학폭이 그렇게 끔찍하도록 잔인한 줄 몰랐었다. 피해자의 영육을 완전히 피폐시키는 무서운 악마 같은 폭력 행위였다. 10대 청소년들이 철이 없어서 하는 장난의 수준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며 지속적인 계획을 가진 폭력이었다. 물론 가해자는 폭행을 하면서도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한창 꿈을 갖고 자라는 10대 청소년의 세계에서 해서는 안되고 있어서도 안되는 학교내 폭력이었다. 더 글로리가 방영되면서 학폭이 크게 주목받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학폭은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 수준이 드라마에서 나온 것을 상회할 정도로 잔인하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도대체 해결의 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학폭을 보면서 적지 않은 학부형들이 대안학교를 찾거나 홈 스쿨링을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크리스천 가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교회가 오래 전부터 다음 세대에 관심을 갖고 교회학교의 초등생들과 청소년, 청년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투자를 해오고 있다. 투자에는 평가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데 그냥 밑빠진 독에 물 붙기 하는 모양세이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인한 인구절벽이 교회 학교의 숫적인 부흥을 이루기엔 한계가 있다고 해도, 문제는 그들의 가치관과 교우 관계에서 복음적인 가치관 곧 정의와 평화 그리고 자유안에서 안정과 행복감을 얼마나 심화시키며 증진시켜 왔던가를 평가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의 질서와 문화에 순응하는 착한 교회 오빠와 교회 누나만 양성하는 것으로 그친 부끄러운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과 이웃과 세계를 향한 열린 삶의 목적을 세워주지 못한 체 여전히 ‘다음 세대’란 구호만 외치고 있다. 학폭의 현장에 정의롭고 용기 있는 크리스천 학생 2-3명만 있어도 이런 더 글로리의 참상은 예방되거나 중단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성경적 바른 교육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하며, 교회 학교 교사들의 미성숙과 부실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아야 하지 않을까? 다윗 스토리와 아브라함 스토리는 얘기하면서 다윗과 같은 의로운 용맹함과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훈련이 부재한 교회 교육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더 글로리에 등장하는 가해자의 주요 인물 안에는 목사의 딸이 있고 그녀가 마약 중독자로 그려지고 있음이 오늘 한국 교회 교육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목사의 딸이 학폭 가해자의 주요 인물이 되었을까? 학폭 이전에 교폭을 어릴적 부터 경험하며 자란 때문이 아닐까? 학폭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폭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인들의 무리지음, 교회 안에도 패거리 권력이 있지 않은가? 어린 자녀들이 밥상머리에서 부모와 어른들이 하는 타 교인에 대한 비방과 험담들, 그리고 실재로 부모들이 교회 안에서 당을 지어 다투고 욕하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세계인 학교안에서 친구를 왕따시키고 놀리고 욕하며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못하고 만 것이 아닐까? 그런 중에 학폭의 핵심은 아니더라도, 학폭을 알고 보면서도 무관심과 방관함으로 학폭이 곰팡이처럼 자연스럽게 번져진 것이 아닐까?

현직 목회자의 자리에서 은퇴한 지금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교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지하지 못했고, 교폭이 가능한 교회내 직분의 카르텔을 예방하지 못했다. 사실 현직에 있을 때는 교폭을 심각하게 인지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금번 글로리를 보면서 오브랩이 되어 왔다. 교폭의 피해자의 영혼이 피폐되어 교회를 떠나거나 숨죽여 지내고 있는 분들이 수 없이 많을 것이란 죄책감이 든다.

이제는 성도들의 품성과 인격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품성 훈련을 하는 교양교육의 수준으로는 안될 것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문자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중생의 은총에 기인한다. 더 이상 피상적인 종교적 봉사꾼들로 훈련시키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심령의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럴 때 교회가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교폭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치료하려면 목회 상담이 피상적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글로리의 피해자 문동은의 주변 사람들 중 양호실 선생님은 그녀의 실재를 보고 듣고 보호하려 했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이 문동은에게는 희망의 한겹 실이 되어 주었다. 형식적이고 사무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 내담자를 보고 내쳐 버리면 안된다.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했다. 심층적인 대화가 필요하고 내담자 중심의 들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야 죽음의 기운에 짓눌려 겨우 살아가는 피해자를 치료하며 구원 할 수 있다.

더 글로리!
깊은 여운을 갖고 교폭의 피해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참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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