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0) 한목협 제19회 전국수련회 기조발제 논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서 바라본 한국교회”라는 이말테 박사님의 발제를 통해 “한국교회가 갈 길”을 다시금 모색해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모판이 될 것이고, 앞으로 새로이 다가올 500년을 한국 개신교회가 힘차게 전진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게으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웠다(We learn from history that we do not learn from history)”고 한탄하였지만,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여 “옛 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새 것을 알아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옛 것을 알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판단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스승의 길, 곧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의 발제자는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과연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종교개혁의 정신을 통해 21세기의 한국 개신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면서 이것을 통해 개신교의 본질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개혁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먼저, 발제자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설명하며 “루터가 개혁자”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진정한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였는지 강조하였습니다. 루터가 처해 있었던 16세기의 시대적인 상황, 그 자체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외적 동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다른 곳에서부터가 아니라 바로 루터의 내면에서부터 발화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 곧 ‘우리는 의로운 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스콜라주의의 구원관은 ‘신자가 구원을 공로로 얻을 만큼 충분히 선한 행위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 스스로도 구원에 대한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루터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중세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콜라 신학사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초대교회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을 통하여 성서를 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서 원어를 통해 직접 성경을 읽어내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중세의 스콜라신학을 넘어서는 종교개혁의 놀라운 패러다임인 “이신칭의”의 성서적인 기초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칭의교리는 중세의 교회론과 신학의 틀을 깨뜨리는 신앙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개혁자”라는 발제자의 강조를 통해서 한 사람의 개혁의 의지, 특별히 개신교 교회의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 한 사람의 개혁의 의지가 참으로 중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 한국 개신교회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마음에서부터 개혁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깨닫는 제2의 후스와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히가 나와야 합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이며, 성직자였던 루터가 외적으로 무르익었던 종교개혁의 시대를 읽고, 성서적인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 잘못된 신학과 교회관, 세계관을 깨뜨렸던 것처럼, 오늘의 시대를 읽어내며 올바른 성서적인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신학을 고백하며 개혁하는 한 사람의 개혁자가 필요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세상과 하나님,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세우심을 받은 목회자로부터 개혁의 물고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루터가 개혁자였다”는 사실은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야 할 우리 목회자들에게 많은 과제를 던져줍니다.


둘째로, 발제자는 ‘루터의 95개조의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실제적 포성이 울리게 하였던 원인인 면죄부를 언급하면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한국 개신교회의 기복신앙의 연관성을 지적합니다. 루터 시대의 면죄부가 사후의 삶의 안전과 보장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의 헌금관은 오로지 현세적 삶에 복을 가져다 주는 것에 큰 비중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발제자는 한국 개신교의 기도관, 곧 기도를 통하여 운명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도 기도가 복을 가져오는 도구로 전락되어 있다는 것을 비평하였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헌금과 기도에 대한 태도는 현대판 면죄부와 같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기복신앙은 번영신학의 한 형태로 영광의 신학의 대표적 사상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적 사상은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상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헌금과 기도관이 면죄부적 태도가 아니라 청지기적인 태도로, 자아가 죽고 주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되는 성서적인 헌금과 기도관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뜻 깊은 해에 한국 개신교회들은 우리 안에 은근히 들어와 있는 현대판 면죄부적인 신앙들, 곧 기복신앙을 개혁하는 것이 이 시대의 종교개혁의 또 다른 과제입니다.


셋째로, 발제자는 루터시대의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낮은 교육수준과 잘못된 동기로 성직자가 된 것, 그리고 온전한 사제로 세워지게 하는 교육과 훈련의 부재로 인하여 가톨릭 교회가 더욱 타락의 대로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심지어 신학전공을 한 학기도 하지 않아도 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500년 전의 가톨릭 교회의 문제가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의 문제라는 것을 발제자가 조심스럽게 제시합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 검증되지 않은 많은 무인가 신학교들이 난립하고 있고, 신학 대학원에서 3년만 신학을 전공해도 목사안수를 주는 목사안수의 낮은 문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 땅 가운데 성서적인 가치관으로 세워야 하는 목회자들의 낮은 영적, 질적, 지적 수준의 문제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 앞서서 자신이 몸담고 가르치는 사제들을 양성하는 학교인 비텐베르크 대학을 개혁하였습니다. 그들이 올바르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도록 특별히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초대교부들과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배울 수 있도록 라틴어학교 설립을 제안하였습니다. 루터는 수준 있는 교회와 목회자를 훈련하고 양성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더욱 힘을 얻고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교회들이 진정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목사 후보생들의 교육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의 수준을 어떻게 높일까에 대한 고려가 각각의 신학교들의 차원을 넘어서 각 교단들이 함께 연합하여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이 해에 한국교회의 목회자 양성기관들과 제도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발제자는 비록 루터 시대의 가톨릭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억압하고 때로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방종하게 하며 타락하게 하였다는 지적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도덕적, 성적 부도덕이 극에 달하는 기독교윤리의 부재현상을 비판하였습니다. 500년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하지만, 한국개신교회 속에도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가 산업화와 세속화, 자본주의에 편성하여 세상과의 구별됨을 잃어버리고,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삶의 실천적 윤리를 가르치지 못하고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삼일운동 당시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겨우 1.3%에서 1.5%이었으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 삼일운동을 점화한 48인 가운데 24인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삼일 만세운동의 거점 중에 많은 곳들이 교회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하에 개신교회들이 교회를 넘어서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감당하였습니다. 발제자는 영어의 “Reformation”을 단순히 “종교개혁”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루터의 개혁은 500년 전의 교회의 개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중심에 서있었던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던 운동이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교회와 사회 모두를 품는 개혁이었음으로 “종교개혁”이라는 번역보다는 “큰 개혁”, “대 개혁”이라는 말이 더욱 적절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교회는 사회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다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사회를 섬기는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온전한 기독교의 윤리를 가르쳐야 하며, 세상과 구별되는 성서적인 가치관과 삶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여 옮겨야 합니다. 은연중에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성공주의와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속아 내고 성서적인 윤리와 삶의 토대 위에 교회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말테 박사님의 발제 전체가 모두 다 중요하지만, 특별히 위의 네 가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말틴 루터에게 일어났던 내부로부터의 종교개혁의 자각이 오늘날의 종교개혁의 주체인 목회자들에게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한국 개신교회들은 우리 안에 은근히 들어와 있는 현대판 면죄부적인 신앙들, 곧 기복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한국교회의 목회자 양성기관들과 제도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한국 개신교회가 이 사회의 주변인이 아니라 중심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개혁되어야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