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조부 선교 기념비 제막식에서

지극히 기초적이며 동시에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를 우리는 매우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미 확고하게 알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간과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이런 질문을 제목으로 정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식이 늘 행동과 삶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 행동과 삶이 평생 아니면 적어도 목회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된다는 보장 또한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목회 환경을 둘러싼 숱한 유혹과 자본주의, 세속주의, 대형화와 성공을 향한 거대한 물결 속에서 과연 성경이 말하는 참 목자로서 정체성과 삶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던지며 자신을 냉정하게 살핀다면 이 질문이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이 단순한 질문은 작년 10월 30일에 천국 가신 아버님(박요한 목사)의 평생의 삶을 다시 되새김하면서 나온 것이다. 선친은 신학도로부터 시작해서 50년을 목회와 목양의 길에서 사셨던 분이다. 10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18세(1934년)에 최초 신학을 시작하셨던 시대가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이었으며, 성경을 배우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과정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담양에 순담 청년성경학원을 세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탈미지(Talmegy, John Van Neste 1884-1964, 한국명 타마자 1910년 내한, 광주선교부 소속)’이었다. 순담 성경학원에서는 성경을 비롯하여 성경개론, 설교학, 구약사기, 교회사, 조직신학, 영어, 개인전도학 등 요즘 신학대학에서 볼 수 있는 과목을 지도하였다. 강사진은 타마자 목사 내외, 원창근 목사, 허화준 목사, 양동혁 목사, 박동환 장로, 유기섭 목사 등이었다. 순담성경학원은 3년 과정으로 학생 대부분이 근로 장학생이었으며, 수업시간 이외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함으로써 학비를 면제 받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쳐 전도사로 배출하되, 철저한 자립정신으로 농촌 교회의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으며, 학생들에게 근로 장학제도를 도입하여 지도하였다. 선친은 2회 졸업생이었다. 미국 남장로교의 타마자 선교사는 철저한 보수정통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감화와 영향 아래 제 1대와 2대 목회자 신학자들이 배출되어 한국의 보수 신학을 이끌어 갔다.

1990년 흑산도에서 영산도 가는 어선에서

타마자 선교사는 담양군 봉산면 양지리에 수만 평의 황무지를 사들였다. 대부분 모래로 뒤덮여 아무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이곳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학생 전원이 근로 장학생으로 이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날마다 지게를 지고 모래를 져 날라 제방을 쌓아 홍수로 인한 수해예방을 하였으며 학생들이 스스로 일해서 학비를 충당하는 자립정신을 심어 주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타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근검절약하였지만, 전도하는 일에는 정반대였다. 학생들에게는 전도용으로 자전거 한 대씩을 사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자전거를 마련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웬만한 일본인도 자전거 갖기가 쉽지 않던 때였는데, 학생들에게 자전거는 경이로움이었으며 자부심이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현실적인 증거물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지만 타마자 선교사는 고무신에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근검절약하며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는 마음자세를 선교일념으로 삼았다.

선친은 순담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21세의 청년 때 담양읍교회(허화준 목사) 전도사로 첫 번째 사역을 시작하셨다(1937년). 타마자 선교사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분이 바로 허화준 목사님이셨다. 아버님의 청렴, 정직, 성실에 기초한 목자로서의 경건한 성품과 근검절약, 교회와 목양 최우선의 삶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선친은 1948년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 선친은 “그때 나는 바른 신학, 정통 신학을 보수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셨다.”라고 회고하셨다. 함평 궁산교회 시무중 안수를 받았는데 거기서 6·25를 당했다. 선친도 공산당에게 붙들려 한 달간 옥살이를 했는데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공산군은 옥에 갇힌 이들을 한 사람씩 불러가 사형시켰다. 같이 잡혀있던 한 장로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우리 때가 다가오는 것 같으니 죽을 준비를 합시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했으나 다음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가 석방됐다. 총살 직전에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다. 이런 목회 여정을 거치시면서 선친은 오로지 목양일념(牧羊一念)에 평생의 삶을 거셨다. 이 4자 성구는 선친의 주택 거실에 걸려있었던 편액이기도 하다.

1995년 아버님과 함께 한 성지 순례 중 시내산에서

나는 아직 이 목양일념에 담긴 선친의 삶을 몸으로 살아내지도, 온전히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다만 어렴풋이 선친의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을 따름이다. 선친은 1983년 목회 은퇴를 불과 4년 앞두고 조부께서 1910년대부터 1945년까지 헌신하셨던 남서해안 일대 낙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일종의 가업인 셈이다. 조부는 그 어렵고 힘든 시대에 동력선도 아닌 배를 이용해서 목숨을 걸고 낙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개척하셨다. 조부께서 개척하신 교회가 수십 군데가 되니 참으로 감사하고 귀한 일이다. 선친은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소외되고 어두운 낙도 전도와 사역을 위해 94세에 내가 최종적으로 모시고 갔었을 때까지 28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셨다.

지역교회 목회 현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낙도에서도 목양일념의 신념과 삶을 추호도 바뀌지 않았다. 89세(https://www.youtube.com/watch?v=OD8PVCOAz8I) 및 93세에 사역하신 유튜브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fxEWUQbNZpM)을 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다. 상당수 낙도에는 정기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서 어선을 빌려서 접근하는데 당연히 선착장이 있을 리 없고 방파제만 있는 데 그 경사가 70-80도에 이르는데 방파제에 설치된 쇠말뚝의 돛 줄만을 의지하여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접근하시며, 낙도의 한 영혼을 위해 찾아다니시고 가가호호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기도해 주셨다. 93세에 낙도의 여전도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례 집례를 위해 상계동에서 새벽 5시 첫 전철을 타시고 서울역까지 가셔서 열차로 목포를 거쳐 섬에 가시기도 하셨다. 단 한 사람의 세례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6명의 성도들에게 성찬을 나누신 후 여객선의 벽에 기대어 피곤한 몸으로 주무시는 장면이 지금도 선하다.

1995년 우도의 초등학교에서

목양일념은 구호가 아니다. 목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단 한 마디 ‘목양일념’으로 산다고 감히 나는 단언한다. 그러나 목양일념에는 상상할 수 없는 자기 부인과 희생, 고난이 기다린다. 그래서 살아 있는 순교자로 목사는 부름 받았다. 돈, 명예와 권력, 여자, 정치에 함몰되고 그것들 때문에 타락하며 변질되는 목사들이 이 시대에 많은 듯하다. 총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선친은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로 지탄이나 의혹을 받으신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도 모르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선친을 ‘성자(聖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다.

목사가 목양일념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충성스럽게 따라가는 목자의 사명과 길을 포기한다면 도대체 목사는 왜 존재하며 무엇으로 산다고 할까? 하나님이 구원받은 그분의 백성 중에서 목사로 부르시어 맡기신 이 영광과 거룩한 과업에 담긴 무게를 안다면 어찌 깨어 기도하며 겸손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거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을 마친 후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신실한 종들에게 베푸실 그 상급과 영광을 지금 당하는 고난과 어찌 감히 비교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내가 진정 소명을 받은 목사라면 목양일념으로 살겠노라고. 죽기까지 충성하며 이 길을 가고 그 어떤 것에도 타협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충성할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 선친이 더욱 그립고 그 발걸음을 계속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엎드린다. “오, 주님! 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종을 부디 은혜로 붙들어 주시어 끝까지 충성하며 영광 돌리게 하소서!” 선교지의 선교가 끝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건강을 따라 또 다시 나 또한 낙도선교에 최후의 삶을 드리고 싶다. 부디 교갱협 모든 동역자들의 목회 현장에서 목양일념의 가장 큰 복이 충만하시길 바란다.

1995년 경남 통영 사랑도의 축호전도
1995년 전남 영광 소각시도의 전도
1996년 하태도의 한 성도 집에서
2009년 93세 때 영광 송이도 교회의 세례 및 성찬식 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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