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적지 않은 한국 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장로들 때문에 하나님까지도 경멸하기 시작한 한국의 사회적 흐름을 느끼고 있다. 동시에 적지 않은 교인들도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와 자기 교회 지도자들이 변질되기 보다는 변화 되어 교회 안팎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다음은 기도하는 분들의 기도응답으로 깊은 벼랑 끝으로 끌려가던 우리 교단 총회가 이 정도로 폐회하지 않고, 파회하게 되었다.

이는 총회 기간 중, 총대들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결정 되었는가 여부와 상관없이 총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을 넘어 복종한 결과이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총회 현장이 되기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발언대를 최소한 5군데 정도는 설치해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총회 현장 맨 앞 쪽에 오직 한 군데에서만 발언할 수 있고, 또한 발언을 허락하는 것은 더 이상 총대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둘째, 발언자에게 필히 발언 시간의 제한을 두어야 한다.

국가의 중요한 의제를 다루는 국회상임위 혹은 청문회도 발언 시간을 제한하는데, 하물며 총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논하는 현장이 아닌가? 또한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주님이 아니라 질서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이제는 대부분의 총대들이 그렇게 길게 설명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무지한 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전자투표 제도 도입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지금처럼 총회 현장에서 무기명 투표 또한 중요한 의제에 대해 손을 들어 가부를 결정하는 관행에 대한 문제점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이 제도는 시간적으로 큰 낭비이다. 특히 거수는 그 정확도에 떨어지며, 그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의심케 하여 총대들에게 불신을 가중 시키고 있다.

물론 노회 총대로 두·세 번만 총회에 참석하였다면 왜 과감히 전자 투표 제도를 도입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넉넉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전자투표 도입을 혁명적 발상으로 보지 않고, 개혁적 조치로 여기고 있는 다수 총대들의 말없는 아우성을 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넷째, 부총회장 및 임원 후보자들, 그리고 이사장 후보자들의 선거관리위원회 등록 시작을 총회 개회 한 달 전으로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후보자로 등록 후, 오랜 기간 후보 자격 여부를 논하다 보니 생각보다 적지 않은 뒷담화와 뒷거래가 생기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혹 그 한 달이라는 등록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시는가? 만일 선거관리위원회가 그 한 달 동안 후보자를 결정할 수 없다면 총회 현장에서도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총대들이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이번 총회 개회 첫날에 보았기에 내년에는 결단이 있었으면 좋겠다.

해 아래 새 것은 결코 없다. 그렇다고 새 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열정조차 포기하는 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총회에 걸맞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요새는 더욱 더 총신대와 총장 사태로 학교 안팎이 혼란스러워 안타깝다. 우리 총신은 대학교이지만, 일반 대학이 아니라 신학대학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할 줄 아는 학생들을 양육하여 미래 한국교회와 총회를 책임지게 하는 사명이 지닌 선지동산이다. 그러므로 지금 총신의 아픔에 대한 해결방법은 오직 코람데오, 즉 당사자들이 하나님 존전의식을 회복하여 결단하는 것뿐이다. 앞으로의 사법적 판단과 그 결과 여부보다는, 과연 우리 자신이 이 신학생들 앞에서 영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모델이 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심각하게 판단해야 한다.

동시에 지금은 그 누가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성경으로 자아를 보고, 기도로 길을 묻고, 성령으로 응답을 받은 후,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할 때이다.

그 이유는 지금 한국의 목회상황은 실제 목숨을 내걸고 사역해야 할 순교시대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욕되게 할 배교시대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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