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이 하늘에서 불러주는 찬양을 듣는 사람들,
참으로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열리는 장면, 신령한 세계가 아닌가. 예수님이 나시던 밤에 들에 있던 목자들이 그랬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가사였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아기 예수님을 뵈었다.

천사들의 찬송을 듣지 못하더라도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가도 참으로 신령하고 거룩하다.
그리고 찬송을 드리는 것도 성도들이 누리는 큰 복이다. 그래서 “찬송가를 곡조 있는 기도”라 한다. 말씀은 목회자의 설교로 듣지만 기도드림과 찬송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드릴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다.

일제의 간섭과 강요로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도
많은 교인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그 일로 감옥에 갇혀 옥중 순교하신 한 분이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님이다.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였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안이숙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김두석 자매 이야기다.
그녀는 주기철 목사님이 마산 문창교회 시무하던 때에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믿음을 본 받았던 것이다. 25세에 투옥되어 악랄한 고문을 다 견디고 5년 만에 출옥했다. 기도와 찬송은 눈물이고 능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주일마다 11시에 홀로 예배를 드렸다 한다. 성경책도 찬송가도 없었지만, 마음에 새긴 말씀을 암송하고 찬송가도 불렀다. 간수가 쫓아와 곤봉과 채찍으로 매질을 한다. 그래도 기도와 찬송을 멈출 수 없었다. 개의 입에 씌우는 고무 망으로 얼굴을 덮어씌우기도 했다. 간절한 심령으로 터지는 찬송과 기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교회도 옥중 성도들도 하나였다. 교회는 ‘찬송기동대’를 조직했다. 자유롭게 감옥을 찾아갈 수 없고,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감옥 가까이 접근하여 담장 밖에서 목소리 높여 찬송을 했던 것이다. 옥중에 매인 성도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찬송이요 위로와 격려요 순교 신앙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김두석 자매도 출감해서는 ‘찬송 기동대’와 동행했다. 마산경찰서 담장 밖, 유치장 가까운 곳을 찾아갔다. 열차가 지나가며 기적을 울릴 때 찬송가를 불렀다.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소리 높여 찬송했다. 찬송을 부르는 자들도, 옥중에서 찬송을 듣는 자들도 함께 믿음을 다지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일사각오’를 다짐하며.

주기철 목사님도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찬송하며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의 믿음 순결을 지키다 순교하셨다.

안이숙도
“좁은 이길 진리의 길 주님 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고백하며 증인의 삶을 살았다.

손양원 목사님은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주님 고대가’로 믿음의 정절을 지켰다.

내가 교회를 맡고 있던 1980년대까지는 성탄절 때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다녔고,
그 후로도 광주교도소와 소록도 여러 교회를 다니며 찬양예배를 드렸다. 농촌교회 부흥회를 인도할 때면 우리 찬양팀이 동행해서 찬송을 인도했다. 이런 일은 그 교회 성도들과 찬양대원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

새해를 맞는 봄 심방을 앞두고
성도들의 ‘올해 나의 찬송’을 적게 했더니 ‘지금까지 지내온 것’,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등이 많았다. 심방 때 그 찬송가를 부르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기쁠 때만 아니라 어려운 시험이 있을 때에도
전심으로 기도하며 찬송하는 일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세상 노래에 빠질 것이 아니다.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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