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평 장로 이야기(1)

특별하게 어려운 일을 겪거나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 범사를 하나님의 은혜라 말할 수 있을까.

원망과 불평과 한숨이 바람에 불티 날리듯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더 잘 알아 가면 역설적인 상황에 감사할 수 있다. 불로 연단하는 시험을 겪으면서도 소망을 붙드는 것이다.

양재평 장로님은 한센병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미 고인이지만

그가 남긴 간증을 오늘에 적용하며 은혜를 나누고 싶다. 나는 이런 준비로 그에게 간증을 강청했었다.

“양 장로님의 간증을 기록으로 남겨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합니다.”했고, 몇 달을 다니며 만났었다. 성경암송반에서 활동할 때였다. 비디오도 촬영했었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한센병이 내게는 천형(天刑)이 아니라 천혜(天惠)였어요.” 이 한 말씀이 내 마음에 잘 박힌 못이 되었다. 과연 누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양 장로님이 2007년 10월 15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 15세 소년으로 여수 애양원에 들어와 반백년도 더 되는 65년 세월을 애양원 사람들, 중병을 앓는 사람들과 동병상련으로 가족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예수를 영접했으니 ‘한센병이 천은(天恩) 즉,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1951년에는 시력을 잃었다. 실망하거나 좌절해서 주저앉지 않았다.   1954년부터 성경을 암송했다. 지문도 감각도 없어서 점자도 못 읽었지만 낭독을 거듭하여 들으면서 신약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는 놀라운 자기성취를 이루었다.

애양원에 처음 들어올 때는 교회를 몰랐던 사람이다.

애양원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기독교 신자였고, 또 강권하는 분들이 많아 따라서 예배당에 나갔다. 처음부터 주일이면 새벽기도, 성경공부, 낮예배, 밤예배에 참석했다. 그곳 생활이 그러했다. 애양원은 ‘신앙촌’, ‘예수 마을’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별천지’ 아니었는가.

고향에서 이웃들의 외면과 박대 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한 동네 사람들이 공동우물을 같이 마실 수 없다했고, 빨래도 다른데서 하라고 물리쳤다. 유리걸식하는 한센인 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몽둥이로 위협해서 마을에서 쫓아냈다. 애양원의 이런 분위기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 사랑’ 이었다. 불교도 유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전국에서 소문을 들은 병자들이 걷고 또 걸어서 찾아왔다.

그러나 철조망이 가로막았다. 외국인선교사들이 본국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비로 운영하는 병원이라서 수용인원이 한정되어 있었다. 철조망 밖에 움막을 치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들에게 애양원 출입문은 ‘천국문’ 같았단다.

양재평 장로님도 ‘사랑과 섬김’으로 평생을 살았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부르는 손양원 목사님께 세례를 받은 그는 1954년에 ‘성서암송반’을 모았다. 장애자이지만 남겨진 청각과 기억력으로 성경을 통째로 암송하자고 제안했다. 40여명이 모였다. 모두 열심이었다. 그뿐 아니라 손양원 목사님의 삼부자(동인 동신) 신앙생활과 그들의 비문까지 외우며 방문자들에게 목사님 가족의 순교신앙을 소개했다. 큰 감동이었다.

마지막에는 중병을 앓았다.

한센병에 더하여 이중삼중의 장애를 겪었으니 장암을 앓은 것이다. 그의 거처인 평안요양소 숙소로 찾아가 기도를 올렸다. 내 기도에 이은 그의 기도는 간결하고 간절했다. ‘부족한 종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생명 남은 날 동안 주님 만날 준비 잘하게 하시고, 7천만 민족을 사랑하사 북한에 무너진 교회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하는 내용이었다. 손양원 목사님이 “우리는 한국 교회를 위한 기도 제사장입니다. 기도 공장입니다.” 말씀하셨던 가르침 그대로였다.

육신은 병들었지만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요,

세상은 멸시하고 천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보혈로 구원한 거룩한 백성이었다.

천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로를 받고 영광을 누리고 계시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경배하고 찬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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