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주 장로 이야기(6)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기적 같다.
혼인한 부부. 그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신비요 행복이다.

이렇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니 이는 신의 축복이요, 가정 창조이다. 그러나 결혼한 부부라도 임신은 죄악이고, 낙태하지 않으면 강제 퇴원으로 내쫓는 곳이 소록도였다.

고복남(가명) 장로의 자서전 [엄니의 희생-강창석 씀] 내용이다.

혼기를 훨씬 넘긴 그는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28세 된 자매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믿음의 축복이 세상의 은금보화와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혼인을 승낙했다. 복남이는 병원에 ‘동거 신청’을 했다. 그래야 부부가 사는 가정사(家庭舍)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1973년, 교인들의 축복으로 하나님 앞에서 혼인서약을 했다.

교회의 경사였다. 가구나 살림이나 혼수를 갖춘 것은 없지만 동병상련의 사랑으로 신방을 차렸다. 소록도 사람들 결혼은 대개가 이랬다.  결혼하고 1년. 새댁이(박성자-가명) 아이를 가졌다. 놀라운 기적 아닌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생명을 잉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알게 되면 낙태 시킬 것이 뻔했다.

새댁은 이웃과 직원들 눈을 피해 방에서만 지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 때 교도과에서 불렀다.

“아직 다른 직원들은 모르고 있으니 잘 판단하세요. 아기를 출산할 수 없으니 장기 외출을 해서 아기를 분만하고 오세요.” 명령이었다. 당장 낙태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바깥 어디에도 머물 곳이나 출산할 데가 없었다. 며칠 후 다시 불려갔다. “외출을 안 가려면 아이를 지우든지!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아기를 낳을 수 없다. 잉태된 생명을 죽여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법도 있는가. 눈물이 쏟아졌다. 이 일을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녀는 3일 후, 병원을 찾아가 수술대 위에 누었다. 새 생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자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한없이 울고, 못 먹고, 못 자고, 대인 기피증으로 우울증에 빠졌다. 한참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몇 년 후. 다시 아이를 가졌다.

어떻게든 내 자식을 키우기로 작정했다. 하나님 이 아이를 특별한 선물로 주신 것일까. 12월 25일 새벽, 아들을 낳았다. 잠시 후 새벽송 찬양대가 집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을 불러주었다. 은혜의 날, 축복의 날에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이 부부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발도 없는 이 소식은 금방 사무실에 알려졌고, 아내는 장기 외출 명령을 받았다. 그 날로 핏덩이를 업은 산모는 불편한 몸으로 아기를 데리고 선창으로 나갔다. 시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다급해진 고복남이 부장을 쫓아갔고, 부장은 교도과장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냈다. “추운 날씨에 아기를 보낼 수 없으니, 해동되면 그때 밖으로 보내도 늦지 않으니 기다려 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니 아무 걱정 말고 아기를 잘 키우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선창에 나갔던 산모와 아기가 돌아왔다. 당분간 아기를 어미 품에서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기는 젖을 뗄 때까지 엄마 품에서 자랄 수 있었다. 5개월이 지나고 70 고령인 할머니가 소록도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며칠 후 아기는 등에 업고 소록도를 떠났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한센병 진단을 받은 때부터 아들의 인생 멍에를 함께 지고 살았던 한 평생, 그러나 혈육인 손자를 품어 키웠다. ‘아들 곁에서 죽으리라.’던 소원대로 소록도 아들 집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고복남.

병들고 아픈 것도 서러웠지만,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과 외면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소록도에서의 배고픔과 노역과 비인간적인 학대 등 한 많은 인생을 살았다. 부부가 되었어도 혈육을 잇지 못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세상. 그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소록도 남성교회의 한 분 뿐이 장로로 날마다 예배당에서 살았다. 고령의 교인들을 돌보고, 예배당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일에 애를 썼다. 그도 2015년 5월(78세), 세상 수고를 거두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갔다. 아내와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혼자된 부인 박 권사는 지금도 예배당 종지기로 산다.

새벽부터 예배시간마다 종을 울리고 찬양대에 선다. 남편에 이어 교회 살림을 꾸려간다. 기도 자리에 엎드린 박권사,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주님의 음성만이 위로가 되고 찬양이 되리라.

광주동산교회 여전도회원들과 대화 중인 소록도남성교회 교인들(남성교회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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