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잘 감당하면 이어서 은혜와 복이 연달아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옥한흠 목사가 늘 얘기했듯이 신자에게는 위기가 은혜와 축복의 문을 여는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그런 공식이나 비밀이 있는 것인가. 간증을 들어보자.

한경직 목사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오산학교서 조만식 장로에게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고, 평양숭실대학에 블레어(한국명 방위량) 선교사를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이 열렸다. 어려운 시절에 특별한 행운이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왔다. 그의 꿈은 예일대학 철학박사를 받아서 고국에 돌아와 학자로 일하려 했다. 참 대단한 비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폐결핵 3기가 덮쳤다. 이건 죽음이었다. 삶 자체가 무너졌으니 깊은 절망에 빠졌다. 중증 환자들, 죽음에 내놓은 환자들이 있는 수용소에 들어가 독방 생활을 했다. 홀로 죽어가는 형편이었다.

한 목사의 회고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다 축복이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공부한 햇수가 17년이었어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졌는데 내가 그냥 죽으면 허망하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옆방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그런데 난 살았단 말입니다. 병원 생활하면서, 박사하고 학위 받고, 이런 생각 다 버렸어요. 이미 배운 것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이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 그런 결심을 가지고 한국에 나왔어요…. 하나님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세상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복음전도자로 결단한 것이다. 귀국해서 신의주제2교회를 섬겼고, 1945년에 월남해서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세워서 고생 끝에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시켰고, 1974년에 원로목사로 물러앉았다. 1992년에는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주는 ‘템플턴상’을 받았다. 그는 3년만 아니라 나이 90 넘도록 장수의 복도 누렸다. 확실히 그에게 있어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 큰 시험을 주셔서 헌신과 충성을 서원하게 하여 충성하게 하시는 것일까?

폐결핵을 앓았던 또 한 분 이야기다.

이중표 목사(한신교회 2005년 별세)도 18세 때 폐결핵을 앓았다. 자살을 작정했을 때 이건 또 어떤 궁상인가. 거지 나사로가 생각나고, 지옥이 두려웠다. 교회서 들었던 성경 이야기가 자신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아 다가왔다. “하나님, 살려 주시면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하며 새벽기도 6개월째. 씻은 듯 병이 떠났다. 그는 기도했던 대로 한국 국민을 신자화하겠다는 결심으로 ‘한신교회’를 개척하여 섬겼고, 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충현교회 원로였던 김창인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하여 세계적 교회로 성장시켰던 조용기 목사, 제자훈련으로 신실한 교회의 모범을 보여주셨던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갈보리교회를 개척하여 크게 성장시켰던 박조준 목사, 새벽기도회로 유명한 김삼환 목사도 모두 폐결핵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도 여럿이다.

그리스도인은 병을 앓으면서도 “주를 위해 살겠으니 나를 고쳐 주소서”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히스기야도 병석에서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4) 하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6) 하시며 응답하셨다. 치료만 아니라 직면한 국사까지도 해결을 받았다.

신자는 위기에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음을 들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릎으로 눈물로 회개할 기회, 헌신을 다짐할 기회, 결단해야 할 기회, 은혜 받을 기회는 이렇게 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악인은 망하는 걸까? 깨닫지 못함,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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